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위클리프 (문단 편집) == 평가 ==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릴만한데 100여년후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인 성서중시, 전통주의 반대, 성인 성유물 성상 숭배 반대, 죽은 자에 대한 미사 폐지 등 주장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중세 교회개혁 운동이 신비주의건 수도회주의건 간에 기존질서를 인정하며 도덕성회복에 치중한 반면 위클리프와 그의 뒤를 이은 얀 후스와 마르틴 루터는 '''중세 신학이 잘못되었고 잘못된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주장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일찍이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무렵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대표적 학자 잉글랜드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c. 1290–1349)의 영향을 받아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학문을 위주로 공부했는데,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문과는 다른 길이었다. 일찍부터 잉글랜드는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같은 학자들은 [[파리 대학교]]의 [[스콜라주의]], 즉 아퀴나스의 신학에 강한 비판자였는데 토머스 브래드워딘은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의 방식인 방법론(via moderna)을 받아들였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 칭의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며 중세 신학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물들었다며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를 주장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모두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 영향을 받아 중세신학과 교회를 비판했고 [[종교개혁]]의 모토가 스콜라 철학에 오염된 신학을 바로 세운다는 취지였는걸 감안하면 절대로 우연한 일은 아니다. 위클리프는 보헤미아의 개혁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은 [[리처드 2세]]의 왕비가 보헤미아 출신 안나[* 지기스문트의 누나로 [[카를 4세]]의 딸.]였는데 왕비를 따라 잉글랜드에 건너온 [[체코인|보헤미아인]]들이 위클리프의 학문과 신학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얀 후스]]에게도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